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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동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최고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될까요?
이번 글에서 역사를 통하여 궁금한 점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원전 유대인의 역사적 배경
구약 성경에서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땅”을 약속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기근으로 이집트에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크게 번성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하여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로 부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대이동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어 있던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른 민족을 전쟁으로 몰아내고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게 됩니다.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절이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 확장과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왕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면서 주변의 다른 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게 됩니다.
결국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50년 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일으켜 세웁니다.
유대인은 이후에도 약 600년간 강대국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가 닥쳐도 나라를 지켜내면서 그들의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2. 기원후 유대인의 역사
서기 100년경 로마제국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고통을 초래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연이어지는 반란에 대하여 로마는 아주 무자비하게 응징하게 됩니다.
이러한 토벌로 인하여 수십만의 유대인이 학살된 것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성전은 아주 무참히 파괴가 됩니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많은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반유대주의가 많은 지역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2천 년간 시련을 겪으면서도 민족성을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받은 민족이며 언젠가는 약속의 땅에 돌아갈 거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유대인 분파는 3개로 나눠집니다.
동유럽에 정착한 “아슈케나짐”과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세파르딤”그리고 중동에 정착한 “미스라힘”입니다.
이 중에서도 “아슈케나짐”이 70%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
3. 중세시대 유대인의 역사
유대인이 떠난 예루살렘은 비어 있었기에 많은 나라가 탐내는 땅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통하여 전 세계로 기독교가 퍼지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또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알려진 곳에 사원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슬람 사원이 세워진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였습니다.
이곳이 황금 돔으로 더 유명한 바위의 돔 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성지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야 할 예루살렘은 예상과 달리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중세시대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4. 근대로 넘어가는 유대인의 역사
유대인들은 조상의 땅이며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방에 이스라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시오니즘의 시온은 예루살렘의 한 언덕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9세기말 시오니즘 운동에 강한 추진을 보인 인물은 “테오도르 헤르츨”이었습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었습니다.
신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프랑스에서 유명하게 알려진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장교로 복무 중이었던 “드레퓌스”는 독일에 군사 기밀 정보를 넘겼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드레퓌스”가 무죄인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재판관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헤르츨은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뿌리 박혀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고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헤르츨은 뜻을 같이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헤르츨은 바젤 강령을 채택하였으며 그 내용은 고대 이스라엘이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온주의 운동은 효과가 있었고, 몇 년 후 1900년대 초까지 약 1만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를 처음부터 건설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을 사고 소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초기에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유대인 자본가들의 지지가 있었습니다.
금융 산업에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정착민들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정착을 도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로스차일드 가문입니다.
>>>>> 다음 글 [2편]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본격적인 갈등 시작점, 이스라엘 건국 배경 및 주변국가와의 갈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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