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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글부터 읽어보세요)
1편에 이어서 이번 2편 글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시작된 배경과 이스라엘의 건국 및 주변국가의 갈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시작점
1914년에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영국은 중동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오스만제국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영토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이제 영국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였습니다.
영국의 헨리 맥마흔은 메카를 통치했던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을 만나 협정을 맺게 됩니다.
영국을 도와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한다면 그 지역에 독립된 아랍 국가를 건국을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이 “맥마흔-후세인 협정”이었습니다.
영국의 약속을 믿었던 아랍인들은 열심히 싸운 결과 오스만 제국에 큰 피해를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아랍인들과의 협정을 진행함과 동시에 유대인의 재정 지원을 얻어낼 목적으로 유대인의 대표격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편지에는 팔레스타인이 거주하는 땅에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담겨 있었으며 이를 “벨푸어 선언”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문제는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영국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분할에 대해서도 비밀 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1918년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는데 “벨푸어 선언”으로 힘을 얻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영국이 아랍인들과 맺은 맥마흔-후세인 협정은 결국 폐기가 되어버린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주하여 늘어나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0년동안 유대인의 인구는 15만명으로 불어나면서 두 배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80만명의 아랍인에 비하면 아직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약 45만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땅을 사들이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땅을 잃고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아랍인과 늘어나는 유대인 사이에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서로 갈등이 본격화되었습니다.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는 이스라엘 건국을 촉진하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 거주하던 900만명의 유대인 중 70% 해당하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 독일인에 의해 대학살이 된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드러나면서 세계는 유대인에 대한 동정론이 점차적으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서방의 여러 나라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는 것에 찬성하게 된 것입니다.
1947년 11월 29일에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안을 결의하게 됨으로 이스라엘은 건국의 초석이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80만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람들에게는 전체 토지의 44%가 주어지게 되지만 50만명이 안되는 유대인들에게는 전체 지역에 56%가 주어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엔 결의안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반대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기에 절대 뺏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인의 정체성을 비판하면서 공격했습니다.
애초에 팔레스타인이는 나라나 민족이 아니며 이들은 원래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던 아랍인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이곳을 고생하여 살 수 있는 땅으로 건설하게 되니 팔레스타인인들이 갑자기 이주하여 마음대로 정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합법적으로 사들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 대표 벤 구리온은 아랍 진영의 불만을 묵살하고 밀어부치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난 뒤 2천년 만에 유대인들이 바라던 그들만의 국가를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3. 이슬라엘과 아랍 연합군의 중동 전쟁
이스라엘이 건국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인 1948년 5월 15일 아랍 국가 진영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합니다.
아랍 연합군의 무기는 영국군이 남기고 간 것으로 여러 무기와 전차로 무장하였으며 이들 나라 중 요르단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군의 상황은 탄약도 부족한 심각한 상태로 전투를 치루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유리하게 작용된 점은 아랍 연합군 대부분이 조직력이 약하였고 크게 싸울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어렵게 적군을 막아낸 다음 긴급히 무기를 수입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는 팔레스타인에는 재난과도 같은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원래 주어진 56% 보다 훨씬 더 넓은 78% 땅을 차지하였으며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고향을 떠나는 배경이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추방하였고 거부할 경우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도망가거나 스스로 떠난 것이지 강제 추방은 없었다는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후에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좁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로 내몰려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놓였습니다.
이집트와 레바논, 요르단 전역에 흩어져 있는 난민들에게도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그들은 한정된 직업을 선택해야만 하였고 재산을 획득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난민들은 난민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 글 [3편]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분쟁,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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